[시리즈기획] 세계문화유산을 찾아서<1> 강화 고인돌①

주희정 기자 wnwjdwn@hanmail.net | 기사입력 2021/11/24 [03:30]

[시리즈기획] 세계문화유산을 찾아서<1> 강화 고인돌①

주희정 기자 wnwjdwn@hanmail.net | 입력 : 2021/11/24 [03:30]

<뉴스다임>은 국내의 세계문화유산을 찾아서 소개하는 시리즈기획을 진행한다. 첫 번째는 '강화 고인돌'.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지석묘'로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강화고인돌 유적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 따라 16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돼 있는데 보존상태가 양호한 70여 기가 2000년 11월 29일 화순·고창 고인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탁자식 고인돌이 있으며 무덤방에서 화살촉, 반달돌칼, 팽이형 토기편이 출토되기도 했다. 강화군청 이애경 문화관광 해설사의 도움을 받아 강화 고인돌을 소개한다.

 

 

 

서울에서 차로 1시간에서 1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한 강화부근리 지석묘(支石墓). 고인돌 공원 광장에서  지석묘를 보게 되었을 때 신기하기만 했다.

 

두 개의 받침돌과 덮개돌은 사람의 힘으로 이 돌들을 옮겨서 만들었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돌을 사용했다. 앞뒤 좌우에서 본 고인돌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일반인의 눈으로는 다 똑같은 돌과 바위 같지만 보존상태가 좋은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 보존되고 있다.

 

고인돌 촬영은 쉬운 촬영이 아니었다. 고인돌은 말 그대로 돌이기에 어떻게 촬영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일반인들이 탐방로를 돌아보는 시간 보다 휠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강화부근리 지석묘(支石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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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돌은 순수 우리말이고 지석묘(支石墓)의 지자는 지탱할 (支)자를 써서 돌을 지탱한다는 뜻으로 지석묘(支石墓)라고 한다. 

 

강화부근리 지석묘(支石墓)는 남한에서 제일 크고 남성같이 잘 생겼으며 우리 교과서의 대표적 모델이기도 하다.

 

덮개돌이 50여 t이며 이 덮개돌을 올리는데 필요한 인력이 500여 명의 장정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동네 500명을 다 동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권력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석실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이 고인돌은 탁자식으로 이곳에서 돌칼, 돌화살촉, 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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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청 이애경 문화관광 해설사에 따르면 강화부근리 지석묘는 1964년도에 사적으로 지정됐다. 60년도 후반 70년도 초반에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다 밭이었다. 지금은 강화군이 모두 매입을 해서 공원화되어 있고, 고인돌이 군데군데 있지만 여기에 여러 개가 있었다.

 

고인돌이 큰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 아기자기한 것도 굉장히 많았고 고인돌의 윗돌이 납작하다보니 발판이나 구들로 사용했다.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많이 가져와 사용하다보니 그로 인해 훼손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 당시 살았던 분들의 말에 의하면 가을이면 덮개돌 위에 고추도 말리고, 봄이면 놀이터로 많이 올라가서 놀았다고 하며 그 당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고창, 화순은 뒤뜰에 바로 고인돌이 있다. 이것들을 보면 고인돌이 우리 일상생활과 밀접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유골함을 일본 같은 경우 자기집 정원에 놓아 두듯이 그랬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모르고 고인돌 옆에 집을 지었을 수도 있지만 고인돌은 우리 일상과 함께 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또 어떤 전문가들은 고인돌이 무덤이기도 하지만 부족과 부족 간에 경계석이거나 하늘에 제를 지내는 의식을 행하는 용도로도 쓰였을 것이라고도 한다. 이외에도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강화 지석묘에서는 껴묻기로 토기조각 화살촉, 반달칼등이 전혀 출토되지 않았지만 고려산에 남쪽으로 조금 가면 오상리 고인돌군에서는 자그마한 고인돌이 가족처럼 10기 정도가 모여 있는데 거기에서는 출토됐다.

 

 

강화오상리 고인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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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이곳에는 모두 12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는데 모두 북방식 고인돌이다. 크기는 대·중·소형으로 구분되고 묘실 구조는 'ㅍ' 자 형태다.

 

발굴결과 구석기시대의 구형석기와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조각들이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조각들과 함께 출토됐다. 이는 강화도에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계속 살아왔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외에도 대롱옥, 반달돌칼, 돌화살촉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됐다.

 

강화내가오상리고인돌은 1995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 16호로 지정해 따로 구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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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오상리 고인돌군 안내 표지판  © 뉴스다임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인돌하면 무덤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상리 고인돌군은 크기가 각각 다 다르고  강화는 160기의 고인돌 중 70여기만 고창화순에 묶여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북방식 고인돌, 남방식 고인돌로 배웠는데 지금 아이들은 우리가 북방식 고인돌이라고 불렀던 것을 탁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탁자식 고인돌이라고 하며 긴 다리가 두 개가 있으며 앞뒤에 원래 막음돌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탁자식 고인돌이 무덤이라면 시신을 땅 위에다 놓고 앞뒤 막음돌을 하는 것이다.

 

만들 때 지금의 받침돌 반 정도 만큼 깊이 파서 묻고 흙산을 받침돌만큼 쌓아서 나무토막을 이용해서 덮개돌을 올려 놓은 다음, 흙을 파내 탁자식 고인돌 모양이 나오면  받침돌과 받침돌 사이 가운데에 시신을 놓고 앞뒤 막음돌을 한다는 것이다.

 

막음돌은 깊이 파고 하는게 아니라 막는다는 형식으로 했기에 후대에 없어진 것이 아닐까. 깊이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인돌의 크기를 보고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 부를 이야기 한다. 건축물로 이야기를 하면 건축물을 보면 그 시대 문화, 경제, 정치 모든 것을 아울러 알 수 있듯이 고인돌도 하나의 건축물로 이야기하는 분도 있다.

 

건축물로도 굉장히 훌륭하다고 한다. 이유는 정면에서 보면 약간 오른쪽으로 20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처음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그 후에 여러 자연 환경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손은 안 봤다고 한다.

 

고인돌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중국 요동지방에 많고, 일본은 거의다 개석식, 무지석식이 많은데 이유는 지진 때문에 다리가 없는 무지석식이 많다.

 

그런데 강화에는 거의 탁자식 고인돌과 개석식 고인돌만 있다. 많은 학자들이 탁자식 고인돌에서 바둑판식 고인돌을 거쳐 개석식 고인돌로 형성됐을 것으로 본다.

 

남쪽 고창지역에는 덮개돌이 300t이 넘는 것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화순, 고창은 100m 이하 평지나 다름 없는 곳에 있는데, 강화 고인돌은 고려산 중심으로 분포돼 있다. 고려산을 중심으로 350m 높은 곳에도 있고, 적석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쪽에도 고인돌이 있으며, 적석사 뒤쪽에는 돌을 깨낸 채석 흔적도 있다. 그쪽에서 채석을 하다보니 고인돌이 그쪽에 모여 있는게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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